크리안나-연성글

내 곁에 있어줘요 [겨울왕국/크리안나]

크안 may we may 2020. 5. 9. 01:20

마치 아기 트롤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때와 같은 괴로운 느낌이다,라고 크리스토프는 생각했다.

"아주 제대로 다치셨군요."

의사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안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오른쪽 다리에 붕대를 돌돌만 채 괴로운 숨을 토하고 있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안나는 한동안 외교 업무로 주변 국가를 왕래하던 크리스토프가 오랜만에 아렌델에 돌아오는 것을 잔뜩 설레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크리스토프가 아렌델에 돌아오기 위해 몸을 실었던 마차의 바퀴가 망가져 작은 사고가 났고, 그 사고는 결국 크리스토프의 다리 부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안나는 맨 처음 크리스토프가 다리에 피가 철철 흐르는 모습을 발견하고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겨우 참았다.

"다행히 다리 외에 큰 외상은 없으시군요. 약 일주일 정도 경과를 지켜보고 나서 붕대를 계속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나가 착잡한 표정으로 의사를 배웅했다. 크리스토프는 다리의 통증으로 인해 가늘게 신음하고 있었다. 감기에 걸려도 아픈 티를 전혀 안 내던 사람이 저러는 걸 보면, 지금 정말로 아프다는 뜻이겠지? 안나는 괴로운 마음을 숨기고 남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미안해요...업무 보고서 작성도 빨리 서둘러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해도 괜찮으니까,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요. 나는 오늘 점심 회의 끝마치고 나면 다시 방으로 돌아올게요."
"괜찮아요! 이제 나는 신경쓰지 않아도..."
"어허! 그런 말 하지 마요. 아내인 내가 당신을 걱정하고 신경 쓰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그러니까 그냥 나한테 의지해줘요."

안나가 크리스토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크리스토프는 더 이상 자신이 아내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안나가 방을 나가고, 홀로 남은 크리스토프는 천천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다리를 크게 다쳐본 게 대체 얼마만이더라?

어린 시절의 그는, 작은 몸으로 얼음을 캐다가 틈만 나면 이곳저곳을 다치곤 했다. 하지만 트롤들과 지내기 전까지는 그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해줄 수 있는 이가 없었고, 결국 크리스토프는 몸에 상처가 생겨날 때마다 스스로를 직접 치료하는 방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혼자서라도 언제든 괜찮을 수 있게.

그때는 앞으로도 계속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더 이상 정말 혼자가 아니구나. 크리스토프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

"자, 오늘 식사도 제대로 못 했죠? 게르다한테 부탁해서 피로회복에 좋은 따뜻한 수프랑 고기 요리를 가져왔어요."

회의를 끝마친 안나가 음식이 한가득한 쟁반을 들고 나타나며 말했다. 먹음직한 음식 냄새에 허기가 져있던 크리스토프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고, 안나는 그 모습을 보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다리 때문에 움직이기 불편할 테니까 내가 먹여줄게요."
"네? 돼, 됐어요!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게다가 손은 멀쩡한데..."
"그렇게 계속 불평하면 아예 굶기는 수가 있어요."

안나가 크리스토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크리스토프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안나는 뜨거운 수프를 숟가락을 떠 크리스토프의 입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곧이어 수프를 받아먹은 크리스토프의 목구멍으로 따뜻한 열기가 가득 퍼져나갔고, 그는 통증으로 인해 긴장되어있던 몸이 조금이나마 풀어진 느낌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식사가 마무리 되고, 크리스토프가 그릇은 깨끗이 비운 것에 기분이 좋아진 안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미리 후식으로 준비해뒀던 싱싱한 제철 사과의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식욕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플 때는 뭐든 잘 먹어야 금방 기력을 되찾을 수 있게 되니까. 수프랑 고기 요리가 꽤 맛있었나 보죠?"
"성에서 먹는 음식은 뭐든 맛있어요. 몇 년 전에 처음 먹게 됐을 때는 조금 기름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긴 했지만."
"후후, 하긴 트롤들은 기름진 음식을 그렇게 좋아할 것 같은 이미지가 아니긴 하네요."
"안나. 누누히 말해두지만, 내가 어린 시절을 트롤들이랑 같이 지냈어도 나는 지극히 평범하게 자랐어요."
"네, 네."

안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토프에게 예쁘게 깎인 사과 한 조각을 건넸다. 크리스토프는 뿌루퉁한 표정으로 사과 조각을 건네받고는 우적우적 깨물었다. 안나는 앉아있던 의자를 크리스토프가 누워있는 쪽으로 더 가까이 옮겼다.

"그럼, 이제 뭐 해줄까요?"
"네?"
"오늘이 오랜만에 크리스토프가 돌아오는 날이었어서, 같이 시간 보내려고 점심 회의 빼고는 일정을 조정해놨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계속 크리스토프 곁에 있을 거예요. 자, 어서 내가 뭘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말해봐요."
"마음은 고맙지만...나는 그냥 안나가 이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걸요."
"에이, 자기는 정말 소박한 사람이라니까. 어릴 때 아프거나 그럴 때 특별한 보살핌을 받았다거나 어리광 부려본 적 없어요?"
"없어요."

아차, 방금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안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크리스토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 미안해요...크리스토프..."
"괜찮아요. 난 아무렇지 않아요. 지금 당신이 이렇게 내 옆에 있어주니까."

크리스토프가 손을 뻗어 안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안나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찡한 감정이 자신의 가슴속에 파고들어오는 기분이었다.

"그래. 괜찮다면 안나가 어린 시절에 아팠을 때, 부모님께 보살핌 받았던 얘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요?"
"나는 안나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좋거든요."

아예 제대로 이야기를 듣겠다는 듯 크리스토프가 갈색 눈을 반짝였다. 안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서서히 입을 열었다.

"6, 7살인가? 엄청난 열감기에 걸려서 한창 고생을 했던 적이 있어요. 아마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혼자 반팔 차림으로 밖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어서 감기에 걸렸던 것 같아요. 아빠랑 엄마 두 분 모두 크게 걱정하셨고, 내가 감기 기운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옆에 있어주시던 게 생각나요."
"어릴 때부터 못 말리는 공주님이셨군요."
"흠흠. 아무튼 그때 엄마가 날 품에 꼭 끌어안고는 상냥하게 자장가를 불러주셨고, 아빠는 달콤한 사과를 먹으면 감기가 빨리 낫는다면서 열심히 사과를 먹여주셨었어요. 그 이후로도 감기에 걸린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유독 그때의 일이 아직까지도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어요."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정말 자상한 분들이셨군요."
"네. 그리고 나와 엘사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해주셨어요."
"가능만 하다면 나도 언젠가 두 분 같은 따뜻한 부모가 되고 싶은 걸요?"
"...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크리스토프가 안나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안나는 두 볼이 사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시선을 돌리니, 크리스토프의 뺨도 자신처럼 빨개져 있었다. 우리가 새삼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었구나, 안나와 크리스토프는 포근한 구름처럼 몽실몽실한 기분에 휩싸였다.

"앞으로도 쭉, 계속 내 곁에 있어줄 거죠?"
"당연하죠. 언제까지나, 영원히."

안나가 고개를 숙여 크리스토프에게 입을 맞췄다. 크리스토프는 가볍게 안나의 목을 감싸 안았다. 

"... 불편하지 않아요? 다리, 움직이기 힘들 텐데."
"입술은 움직일 수 있으니까 상관없어요."

말을 끝마친 크리스토프가 다시 한번 더 안나에게 입을 맞췄다. 안나는 크리스토프가 자신에게 편하게 키스할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창틈 사이로 은은한 오렌지빛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아직 함께 나눌 즐거움이 한가득한 두 부부는 여느 때보다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와 안나는 의심할 여지없이 서로가 함께할 운명이었다.

[2020.03.05 연성 백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