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안나-연성글

꾀병 [겨울왕국/크리안나/리퀘스트]

크안 may we may 2020. 5. 8. 21:56

"안나. 거울 떨어지겠다."

 

엘사가 읽고 있던 소설책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의 하나뿐인 여동생 안나는, 벌써 30분 넘게 거울 앞에 진득하게 서있었다.

 

"하지만 크리스토프와의 데이트인 걸?"

 

안나가 손에 들고 있던 원피스를 바닥에 집어던지며 덧붙였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있던 다른 원피스를 손에 들었다. 벌써 10번째 원피스였다. 엘사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지금 약속시간 10분도 안 남은 건 알아?"

"뭐?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단 말이야!? 서둘러야겠네!!"

 

안나는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긴 선택시간 끝에 고른 오늘의 데이트 원피스는, 그녀의 경쾌한 붉은 머리색과 조화를 이루는 차분한 녹색이었다. 원피스와 어울리게 머리를 높게 리본으로 올려 묶고, 노란색 가디건까지 걸치고서 안나는 데이트에 나갈 준비를 끝마쳤다.

 

"오늘은 어디로 가?"

 

"스벤이 끌어주는 썰매를 타고 허드슨 하든 거리에 가볼 거야. 그곳에 진귀한 물품들을 파는 가게가 많다 그래서."

"재밌겠네. 조심히 다녀와. 크리스토프한테 다음 번 제스처 게임 때 보자고 안부 전해주고."

"응. 그럴게. 다녀오겠습니다!"

 

안나는 엘사와 인사를 나누고 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오늘 그녀가 크리스토프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왕실 마구간이었다. 성안의 숨겨진 지름길에 빠삭한 안나는 계단 난관을 춤추듯이 미끄럼 타며 내려오고, 숨겨진 복도를 통해 아슬아슬하게 약속시간에 맞춰 마구간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마구간에 다다르자, 변함없이 든든하고 넓은 어깨를 가진 그녀의 남자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크리스토프!"

"안나. 왔어요?"

 

크리스토프와 안나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이렇게 다정한 포옹을 하는 건 이 커플의 아주 당연한 일상들 중 하나였다.

 

"헤헤. 있잖아요, 크리스토프. 오늘-"

"저기...안나. 정말로 미안한데 오늘 데이트는 못 할 것 같아요."

"잠깐, 뭐라구요?"

 

안나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스벤이 감기에 걸렸어요. 요 며칠 계속 가벼운 기침을 해서 혹시나 했었는데, 오늘 아침에 상태를 확인해보니 갑자기 열이 확 올라가 있더라고요."

"푸흐흥."

 

스벤이 축 늘어진 채 괴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단짝을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에 덩달아 안나는 마음이 애처로워졌다.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데이트는 미뤄야죠! 난 걱정 말아요, 괜찮으니까... 정말로요."

"이번 데이트 기대 많이 하고 있었던 거 뻔히 아는데, 진심으로 미안해요. 스벤이 쾌차하고 나면 다시 데이트 날짜를 잡아봐요."

"네, 좋아요. 아, 혹시 수의사는 안 필요해요? 그렇담 내가 궁전 근방에 잘 아는 사람이..."

"아뇨. 괜찮아요. 안나도 알고 있겠지만 스벤과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바로 나잖아요? 아주 어릴 때부터 스벤이 몸살에 걸리면, 그걸 치료해주는 건 내 몫이었죠. 그러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수의사는 필요 없어요."

 

크리스토프가 스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스벤은 크리스토프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는 듯이 기운이 없는 와중에도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크리스토프는 웃으며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라고 스벤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는 곧바로 스벤의 병간호를 하기 시작했고, 스벤은 크리스토프의 세심한 손길에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다정한 풍경에, 안나는 조금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요..."

"네. 잘 가요, 자기.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안나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남몰래 기대했던 '혹시 병간호를 도와줄 수 있어요?'라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와 스벤은 정말 가까운 단짝이구나.

 

새삼 알고 있던 사실이 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질투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크리스토프가 스벤을 따뜻하게 간호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자기와 시간을 보낼 때의 모습보다도 더 자상한 것 같다는 이상한 착각에 빠졌다. 안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대했던 데이트가 취소된 것보다도, 크리스토프가 스벤을 돌보는 모습에 질투가 나고 있는 제 자신이 더욱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방금 본 크리스토프의 모습은 정말로 다정했는걸!"

 

안나는 한껏 토라진 말투로 소리쳤다. 안나는 거울 앞에서 30분 넘게 고민해서 골랐던 자신의 녹색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형편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마구간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한 가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

 

다음날, 크리스토프의 극진한 간호 덕인지 스벤은 하루 만에 감기가 말끔하게 나았다. 평소의 생기를 되찾은 친구의 모습에 크리스토프는 저절로 흥이 났다.

 

"다행이야, 스벤. 감기 기운이 빨리 떨어져서."

"꾸어엉."

"그래. 네 말이 맞아. 어서 빨리 안나를 만나러 가야겠어. 어제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분명 지금까지도 속으로는 데이트가 취소된 걸 서운해하고 있을 거야."

"푸흥."

 

스벤이 크리스토프의 말이 옳다는 듯 콧김으로 맞장구를 쳤다. 크리스토프는 스벤을 향해 싱긋 웃고는 안나의 방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그가 방문 앞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심란한 표정의 엘사가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엘사?"

"크리스토프. 스벤이 감기에 걸렸다면서요, 이제 괜찮은 거예요?"

"네. 하루정도 옆에서 계속 돌봐줬더니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어요. 참, 지금 방에 안나 있나요?"

"그게... 있기야 한데..."

 

엘사가 곤란하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토프는 이유 모를 불편한 기색에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 있나요?"

"... 안나가... 가, 감기에 걸렸어요."

"네?"

 

안나가 감기에 걸렸다고? 크리스토프는 깜짝 놀랐다. 어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만 해도 전혀 아픈 기색이 보이지 않았는데. 설마, 스벤에게 옮았나? 혹시 그래서 스벤의 감기가 생각보다 빨리 나은 건가? 크리스토프는 의문을 품었다.

 

"혹시 방에 들어가 봐도 괜찮을까요?"

"그거야 괜찮지만..."

"감사해요!"

 

크리스토프는 엘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나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지만, 지금 크리스토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나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안나의 침대로 다가갔다. 안나는 두툼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있는 상태였다.

 

"안나. 나예요. 감기에 걸렸다는 거 정말이에요?"

"에헴, 에헴. 네! 그, 그런 것 같아요. 어흠."

 

뭔가 아프다는 것 치고는 목소리가 밝은 걸? 크리스토프는 의구심을 품은 채 안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스벤의 감기가 낫자마자 당신이 감기에 걸리다니."

"스벤의 감기가 나았다고요!?"

 

안나가 단번에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크리스토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나는 머리가 조금 부스스할 뿐, 전혀 아픈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굉장히 건강해 보였다.

 

"아..."

"안나. 설마... 방금 꾀병 부린 거예요?"

"으으으..."

 

안나는 갑작스레 앓는 소리를 냈다. 크리스토프는 척 보기에도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걱정했는데."

"크, 크리스토프..."

"엘사도 당신이 감기에 걸린 줄로 알고 있던데."

"... 언니한테는 크리스토프가 오면 내가 감기에 걸린 걸로 해달라고 직접 부탁했어요."

"어째서?"

"당신이 어제 스벤을 다정하게 보살펴주는 모습을 보고 질투가 났어요."

"자고로 거짓말은 절대 하면 안 되는... 잠깐, 뭐라고요?"

 

크리스토프가 당황하며 팔짱을 풀었다. 안나는 거의 울상이 되었다.

 

"나, 나도 이상하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정말로 질투가 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스벤처럼 감기에 걸렸다고 하면 크리스토프가 날 걱정해줄 거고, 그러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해요."

 

크리스토프는 아까보다 더 가까이 안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안나의 가녀린 몸을 힘주어서 끌어안았다. 안나는 갑작스러운 크리스토프의 포옹에 정신이 혼미해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안나. 정말로 스벤한테 질투가 났어요?"

"... 네."

"풉, 푸하하하."

"왜, 왜 웃어요! 난 진지한데!!"

"그야-"

 

크리스토프가 안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그녀를 침대로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안나의 이마, 코, 뺨, 입술을 타고 내려오며 몇 번이나 키스했다. 안나는 놀라긴 했으나 그의 키스를 굳이 거부하진 않았다.

 

"너무 사랑스러우니까 그렇죠."

 

안나는 볼을 붉혔다. 오늘따라 자신의 눈앞에 있는 크리스토프가 유난히 더 근사해 보였다.

 

"안나. 확실히 스벤이 나한테 있어 둘도 없는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인 건 맞아요. 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존재는 바로 당신이에요."

 

크리스토프가 다정스레 안나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크리스토프의 진심 어린 애정 표현에 안나는 배시시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달콤한 아침이었다.

 

[2020.01.07 연성 백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