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소중한 연인을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에 데려가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어려서부터 아렌델 북쪽 산을 중점으로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명소를 잔뜩 알고 있었던 크리스토프에게는, 안나와 연인 사이가 된 이후 자신의 비밀장소들을 안나에게 소개하는 것이 소소한 기쁨 중 하나가 되었다. 안나는 크리스토프가 데려가는 장소들을 모두 좋아했고, 남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크리스토프와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나에게 꽤나 특별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크리스토프와 안나가 부부의 연을 맺은 뒤 첫 결혼기념일 날이 다가왔다. 안나는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아렌델의 여왕으로서의 치러야 할 업무량이 늘어나 좀처럼 크리스토프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해 답답함과 아쉬움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반면에, 크리스토프는 오히려 안나가 바빠진 틈을 타 아내 몰래 첫 번째 결혼기념일 일정을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었다.
마침내 결혼기념일 당일이 되었고, 겨우겨우 날짜에 맞춰 휴가를 얻어낸 안나는 이른 아침부터 정말 오랜만에 크리스토프와 함께 한 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아직까진 크리스토프와 마부만이 알고 있었다.
"이제 한 10분 정도면 목적지에 도착하겠네요."
마차 창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본 크리스토프가 들뜬 목소리가 말했다.
"대체 어떤 특별한 장소를 준비했길래 이렇게 꽁꽁 숨기는 거예요?"
크리스토프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안나가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내가 오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꼼꼼 숨겨뒀던 장소인데, 쉽게 알려주면 재미가 없죠."
"흠..."
안나가 크리스토프의 답변이 맘에 안 드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프는 씨익하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안나와 크리스토프가 인연을 이어온지도 어느덧 4년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해가 지날수록 성숙해지는 안나의 모습에 대견함을 느끼면서도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안나만의 낭랑하고 활달한 부분에 귀여움을 느꼈다. 계속 바라볼수록 더더욱 사랑스러워지는 존재라는 건 바로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확신했다.
'덜컹'
"도착했습니다!"
"아, 금방 내릴게요! 안나. 자, 이 눈가리개 하고 내려요."
"네? 눈가리개까지 하라고요?"
"딱 한 번뿐인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잖아요. 오늘 하루만은 날 한번 제대로 믿어봐요."
크리스토프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안나에게 눈가리개를 건넸다. 안나는 묘하게 적극적인 크리스토프의 태도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호기심을 품고 눈가리개를 받아 눈을 가렸다. 이윽고 눈가리개를 한 안나를 크리스토프가 부축하며 두 부부는 마차에서 내렸고, 두 사람의 발이 목적지에 다다르자 마부는 서서히 마차를 다시 아렌델 성을 향해 출발했다. 크리스토프는 마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그때서야 안나의 눈가리개를 치워주었다.
"안나. 바로 이곳이 내가 당신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장소예요."
안나는 크리스토프의 목소리에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앞에 드러난 건 아주 푸르고 잔잔한 숲 속에 자리 잡은 작은 오두막이었다. 안나는 오두막을 보자마자 그곳이 동화책에 나오는 아주 오래되고 정다운 느낌이 드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오두막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트롤들이랑 살기 전에 얼음장수 아저씨들이랑 한동안 동거 동락했던 집이에요. 몇 년 전에 이 오두막 주변을 내 소유지로 샀어요."
"이곳을 샀다고요?"
"자, 얼른 들어가요. 안나를 위해 준비한 게 아주 많아요."
한껏 들뜬 크리스토프는 안나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두 사람이 함께 오두막에 들어서자 그곳은 고요한 아늑함이 감돌았다. 푹신해 보이는 2인용 나무침대. 작은 부엌. 튼튼해 보이는 나무 식탁과 그 양 옆에 놓인 의자 둘. 고운 천의 카펫까지, 아담하지만 어느 곳 하나 사람의 다정한 손길이 닿아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설마... 이 안에 있는 가구들... 다 크리스토프가 만든 거예요?"
"바로 눈치챘네요? 알아주니 기쁜걸요. 우선 이곳에 입성한 기념으로 따뜻한 차 한 잔 하실까요, 부인?"
크리스토프는 아직 어리둥절해하는 안나를 정중히 식탁으로 안내한 뒤 능숙한 솜씨로 부엌에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안나는 이 오두막이 크리스토프 비요르그먼이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최고의 장소라는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여길 준비한 거예요?"
"준비했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 일단 얘기를 해보자면, 4년 전에 안나를 만나고 아렌델의 얼음 판매 배달 책임자로 일하게 되면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큰돈이 생기게 되니까 가장 먼저 생각난 게 내 명의의 소유지를 갖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어떤 곳을 내 땅이라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이 오두막이 있는 숲이 떠오르더라고요."
"... 아까, 트롤들이랑 살기 전에 살았던 곳이라고 했죠?"
"정확히는 얼음장수 아저씨들한테 객식구 취급을 당했던 장소였어요. 5살 때쯤 고아원을 빠져나와 얼음 장수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고, 얼음 호수에서 일하던 아저씨들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이 오두막에서 먹고 자고 모든 생활을 여기서 했었죠. 스벤이랑 처음 만난 것도 이 오두막 근처였어요. 하지만 트롤들이랑 지내게 된 이후로는 몇 년 동안 이곳을 잊고 살았어요. 그러다 소유지를 알아보던 중 이곳이 생각났고, 한 3년 전쯤에 이곳을 다시 찾게 됐어요."
"신기한 일이네요. 그럼 그때부터 크리스토프가 이곳을 관리한 거예요?"
"그런 셈이죠. 내가 3년 전에 이곳을 다시 찾았을 땐 완전히 폐허나 다름없었어요. 뭐... 여기저기서 들은 바에 의하면 이곳에서 지내시던 아저씨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돌아가시거나 하셔서 이 오두막이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상태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곳을 산 뒤론 스벤이랑 남들 몰래 여기 와서 오두막을 정돈하기 시작했죠. 생전 만들어보지도 않았던 가구도 처음 만들어보고, 이래저래 여기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죠."
"근데 왜 나한테 여태 말 안 했어요? 조금 섭섭한데요."
뿌루둥한 표정의 안나가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는 웃으면서 방금 완성한 따뜻한 차 한잔을 안나에게 건넸다. 부드러운 홍차 향기가 안나의 코를 감싸고 춤을 췄다. 안나는 차 향기에 못 이겨 조심스럽게 따뜻한 차 한 모금을 입안 가득 들이켰다. 상냥한 꽃내음이 몸안에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 오두막은... 나한테 여러모로 많은 추억이 있는 장소라, 가장 특별한 기념일에 안나를 이곳에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에요."
크리스토프가 안나의 손을 다정하게 움켜쥐었다. 그는 안나의 두 손의 짧게 입맞춤을 하고 여느 때보다도 사랑이 담긴 눈동자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갑작스레 간질간질해진 분위기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 진심으로 축하해요. 내 사랑. 앞으로도 아주 오래오래, 저랑 매년 이곳에 와주시겠어요?"
안나는 불현듯 크리스토프가 자신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지금 눈 앞에 있는 크리스토프의 표정은 그때의 자상한 표정과 같은 표정이었다. 안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크리스토프에게 안겨들었다. 크리스토프는 말없이 안나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
찬란한 햇살이 숲 속을 가득 채웠다. 고요한 오두막 앞에서 부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크리스토프는 한창 불을 때기 위해 필요한 나무장작을 패는 중이었다. 안나는 이전부터 크리스토프가 생활력이 강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긴 했으나 그가 장작을 직접 패는 모습을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툭'
"내가 나무장작 패는 모습이 그렇게 신기해요?"
안나의 예상치 못한 뜨거운 시선에 당황한 크리스토프가 물었다.
"당연히 신기하죠! 크리스토프가 장작을 팰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요."
"산 사나이 출신이라면 이 정도는 보통이에요. 흣!"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장작이 두 갈래로 나뉘어갔다. 안나는 오늘따라 크리스토프의 팔근육이 참으로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사실 좀 위험하게 느껴진다는 말이 더 옳았다. 지난 며칠간 바쁜 일정 탓에 좀처럼 부부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안나는 내심 아까 크리스토프의 품에 안기게 된 순간, 모처럼 남편과의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크리스토프는 안나를 가볍게 토닥여주고는 점심식사를 하자면서 안나를 오두막 밖으로 이끌었다. 그래. 아직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안나는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여전히 장작패기에 몰두 중인 남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우여곡절 끝에 장작패기가 끝나고, 크리스토프는 재빠르게 점심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안나는 몇 년 전에 크리스토프의 플래미그래딩 스튜를 처음 먹은 이후 한동안 그의 요리 솜씨에 대해 엄청난 불신을 품고 있었으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평범한 요리는 상당히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실력자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는 누구보다도 그의 요리를 좋아하는 한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자. 오늘의 점심 메뉴는 특제 감자 크림수프, 당근 글라세, 햄 샌드위치입니다~"
"우와, 맛있겠다!"
"점심 먹고 나서 그동안 못 놀았던 만큼 실컷 놀기로 해요. 안나는 뭐가 가장 하고 싶어요?"
"네? 하, 하고 싶은... 거요?"
안나는 얼굴에 붉은 색소가 퍼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안나의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솔직한 반응에 나란히 얼굴을 붉혔다.
"어... 이, 일단 먹을까요?"
"네! 네! 어서 먹어요!"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은 동시에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프는 음식을 먹으면서 정신없이 손을 바삐 움직이는 안나를 슬쩍 살폈다. 사실 크리스토프도 요즈음 부부의 시간이 그다지 없었다는 것에 조금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전부터 안나에게 분위기를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평가를 여러 번 들었던 터라, 오늘 같은 특별한 날만큼은 제대로 분위기를 잡고 부부의 시간을 가져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방금 같은 귀여운 반응은 반칙이지.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어 지잖아.
"잘 먹었습니다! 이야! 크리스토프, 요리 솜씨가 더 좋아진 것 같아요! 너무 맛있다!"
"그, 그래요? 다행이네요.."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조심스러운 적막이 흘렀다. 이전에도 안나와 크리스토프와 사이에는 이러한 적막이 흘렀던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기류가 조금 남달랐다. 단 한 번뿐인 특별한 날이기 때문인 걸까.
"저기... 안나."
"네, 네?"
"모처럼이니까... 오랜만에 같이 목욕할래요?"
안나의 얼굴이 다시금 붉은색으로 피어올랐다. 크리스토프는 오늘은 오랜만에 성에서 벗어난 만큼 하인들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날 밤이 그 해의 밤들 중 가장 뜨거운 밤이 되었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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